정진아 - 불완전 채식주의자
2022.12.28에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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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보호단체가 동물 존재 자체의 사회적 처우와 관리에 초점을 맞춰 활동한다면, 환경단체는 동물이 서식하는 생태를 보전하는 데에 보다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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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 마리의 동물이 생매장당한 사건을 겪고 나서야 우리 사회,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가축으라 불리는 존재와 얼마나 그릇된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단지 햄버거 빵 사이의 패티, 마트 진열장 속 포장육, 불판 위 고깃덩어리가 아니었음을, 두려움과 아픔을 느끼고 죽음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이 있으며 삶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존재라는 걸 너무 오랫동안 모른 척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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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권이나 환경 문제 외에도 육식은 빈곤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세계에는 여전히 기아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엄청난 양의 곡물이 인간의 식량 대신 가축을 사육하는 데 쓰였다. 선진국 국민들의 육류 소비를 위해서였다. 이쯤 되니 고기를 끊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지구온난화의 주범, 빈곤의 원인, 동물에 대학 폭력과 착취의 결과물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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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자책하고 다짐했다가 다시 포기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나는 완벽하게 실천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비육식을 기본으로 식생활을 재정비하기로 했다. 평생 동물성 음식은 아예 입에도 대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탓하거나 책망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죄책감은 잘못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수단이었을 뿐 행동을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감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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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 계기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꿈도, 산업 시스템을 개혁하겠다는 불타는 정의감도 아니었다. 비록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목격자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대한 해보겠다는 작은 의지. 그것이야말로 내가 무력한 목격자로만 남아 있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자 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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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부속품에 불과하지만, 내가 소비하고 관계를 맺는 모든 생명은 사소하지 않았다. 먹고 쓰고, 사고 버리는 모든 행위에 내 욕구 대신 동물을 우선으로 두고 애쓰다 보면, 대단한 생의 의미까지는 찾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 존재가 쓸모없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언젠가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넋두리를 늘어놓다가 '어차피 내 힘으로는 별로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그냥 다 모른 척하고 편하게 살고 싶다'며 한탄을 내뱉은 적이 있다. 한참을 가만히 듣고 있던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디서 이런 얘기를 봤는데, 만약에 자기가 지금 해결을 위한 어느 부분에도 속해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결국 문제의 한 부분이라고 하더라."
나라는 대단찮은 인간은 세상을 뒤흔드는 큰 흐름 속에서 끝없이 부유하는 작은 조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이왕이면 문제보다 해결의 파편이라도 되는 게 낫지 않겠나 싶다. 내가 침묵하고 회피해 온 사이 세상에 문제를 던쳐 온 이들이 나의 고백을 수월하게 만들어 주었듯, 나 역시 사는 동안 발 끝에 채이는 조그만 돌부리 하나라도 빼낼 수 있기를. 그래서 내 뒷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가뿐하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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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고기 등 가금류를 먹는 폴로 베지테리언의 경우 채식주의자라면서 고기를 먹는다고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이 또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의미가 있다. 탄소 발생률이 더 높고 사육에 필요한 면적 또한 더 넓은 소나 돼지 등 대형동물을 줄이는 것이 채식을 통한 효과를 보다 높일 수 있으므로 완전히 고기를 끊기 어렵다면 일단 가금류만 허용하는 방식부터 시도해 볼 수 있다. 평생 해나가야 할 도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결함보다는 꾸준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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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다 앞으로도 숱한 실수를 거듭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결정도 반복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더 이상 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를 검열하며 타인에게든 나 자신에게든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대신 그 선택이 나에게서 뿌리내린 결과물이라면 다소 모순적이고 허술한 구석이 있더라도 좀 더 믿고 응원할 것이다. 내가 더 열심히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이 가장 큰 힘이 되어 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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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생명의 종과 수를 줄이자는 주장이 그토록 허황되고 조롱받을 일인가. 같은 생활권 안에서 함께 살아가며 매일 마주치는 동물조차도 인간의 음식으로 여기는 사회라면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다른 동물의 권리나 복지 또한 존중될 리 없다. 소, 돼지, 닭은 먹으면서 개만 먹지 말라는게 못마땅하다면 개 식용에 찬성할 게 아니라 개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육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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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 동안 여성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의 낙태 방지 공익 광고는 이 분야 단골 레퍼토리였다. 낙태로 인한 죄책감의 주체에서 남성이 제외된 것이나 여성의 신체 자기결정권 문제 등은 차치하더라도, 양육의 준비도 안 된 상황에 왜 덮어 두고 아이만 낳으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하는지 의문이 드는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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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곧 출산을 위한 도구로 바라볼 뿐 아니라 이를 숨기기 위해 최소한의 위선적인 노력조차 하지 않은 '가임기 여성 지도'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결과물이었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하고 강요한 역할과 의무는 '재생산 능력을 발휘해 사회 유지에 이바지할 것' 딱 거기까지였다. 각 항몽에 소나 돼지를 대입해 보아도 전혀 이질감이 없을 만큼 후진적인 발상에 여성들은 '내가 가축이냐'며 분노했다.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서 재생산력을 착취당하는 암컷 동물과 사회 유지를 위해 임신과 출산을 강요당하는 인간 여성은 분명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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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과 페미니즘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기록한 책, 캐럴 제이 애덤스의 <육식의 성정치>에서는 도살되어 부위별로 해체된 고깃덩어리를 '동물화된 단백질'이라고, 달걀, 우유와 같이 여성 동물의 재생산력 착취를 통해 얻는 부산물은 '여성화된 단백질'이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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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사는 동물이라도 폭력의 피해를 입거나 학대당해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치안 좋은 곳에서 뭘 그렇게 불안해하냐'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삶을 나도 한번 살아 보고 싶다. 지극히 당연해서 누군가에게는 욕망의 대상조차 되어 본 적 없는 삶의 방식이 모든 여성과 동물에게도 적용되길 바란다. 이제껏 누군가는 당연하게 누려 온 바로 그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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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동물이란 필요할 땐 얼마든 이용할 수 있는 열등한 존재이면서도, 나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면 인간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처벌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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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시선도 폭력이 될 수 있고, 쳐다보지 않은 배려가 필요한 상황도 있다는걸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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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우월론자들이여, 합리를 방패 삼아 강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공격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기로 하자. 분명히 존재하는 권력과 계급을 모른 척하며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는 평등은 차별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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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대신 선택한 오트밀크가 한편으로는 산림 파괴에 일조하는 비윤리적 기업의 제품이었다거나, 종이 빨대, 다회용컵 사용 등으로 환경 친화적인 이미지의 프랜차이즈 카페가 지나친 MD 생산으로 오히려 환경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거나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동물의 희생이나 착취에 반대하기 위한 선택이 또 다른 종류의 피해를 가져다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혹스럽고 막막하다. 신념을 바탕으로 한 나의 지향점이 서로 충돌하는 동시에, 내가 추구하는 삶을 완성하는 것이 영영 불가능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삶이 이어지는 이상 무언가를 선택하는 일은 결코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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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이 하나의 문화로 떠오르고 비거니즘을 바탕으로 한 삶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는데도 나는 10여년 전 고기를 끊겠다고 다짐했던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안갯속을 헤매는 듯 막막한 가운데에도 조금 위안을 삼아 보는 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같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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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좋아했던 음식을 어떻게 참냐고 묻는 내게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음식을 먹고싶은 욕구와 먹음으로써 느끼는 만족보다는 내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기쁨이 더 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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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비로소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다친 새를 발견해 병원에 데려가 치료해 준 중학생, 가게에 들어온 길고양이를 내치지 못하고 줄곧 밥을 주며 돌봐 주시던 세탁소 사장님, 보호소에 들어온 유기동물을 구조해 사비로 치료를 하고 입양을 보내는 활동가들과 근 한 달 가까이 잠을 설쳐야 하는 일인데도 강아지 수유봉사에 선뜻 나서 주던 사람들, 누군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조용히 놓아 둔 사료 그릇과 그 주위에 찍혀 있던 조그만 고양이 발자국까지, 이 모든 게 전부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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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선택하고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까지의 전 과정이 당신을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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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어딘가 나와 같은 이가 있다면, 애매한 윤리의식과 적당한 비겁함에 자책을 연발하면서도 동물과 지구에 해를 덜 끼칠 방법을 계속 찾아 헤매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냥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 보자고 권하고 싶다. 지금 이 책 너머로 눈을 맞추고 있는 모두에게 응원의 메세지를 전한다. 완벽하지 않고 가끔은 완전히 실패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생각은 없는 선량한 고집쟁이들에게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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