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 가녀장의 시대
2022.12.18에 읽음
-
“젊음은 괴로워……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거든.”
복희가 묻는다.
“그게 행운이지, 왜 괴로워?”
정수리를 굴리던 슬아가 대답한다.
“다 해봐야 할 것 같잖아. 안 누리면 손해인 것 같잖아.”
복희는 다 해볼 수는 없다고 말하려다가 만다. 슬아도 이미 알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이렇게만 말한다.
“인생에서 손해 같은 건 없어”
정말 그런가, 하고 슬아는 생각한다.
“누굴 얼마나 만나봐야 진짜 충분하다고 느낄까.”
복희는 그런 충분함 같은 건 영원히 없다고 말하려다가 만다.
슬아의 앞날엔 아직도 무수한 데이트가 남아 있을 테니까.
-
슬아 : 두 분이 열여덟, 열아홉 살쯤이었죠?
병찬 : 그랬지. 일단 우리집 형편이 어렵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야 될 것 같았어.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나한테 시집을 오면 조밥을 잡수실 거예요.”
슬아 : 조밥이요?
존자 : 아가, 잔잔한 좁쌀 있자녀. 옛날에 가난한 사람들은 그걸로 지은 밥만 먹었거든.
슬아 : 청혼 멘트 빡세다. 조밥을 잡수시게 될 거라니……
병찬 : 할머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냐? 그 말은 난 지금도 생생햐.
슬아 : 뭐라고 하셨어요?
병찬 : “밥사발에도 눈물이 있고 죽사발에도 웃음이 있으니, 죽을 먹어도 웃을 수 있다면 살겠다”라고 말하는 거야. 내가 열아홉에 그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아버린겨.
슬아 : 결혼해보니까 어떠셨어요?
존자 : 해보니까, 안 한 것만 못햐……
-
존자 : 한번은 복희가 대학 합격했는디 입학금을 내일까지 내야 된댜. 복희가 나한테 사정을 해. 엄마가 입학금만 내주면 자기는 분명 선생님이 될 거래. 학비는 아르바이트해서 어떻게든 낼 테니까 입학금만 도와달래. 선생님이 되어서 다 보답할게, 엄마한테 잘해줄게, 하고 막 사정을 하고 울더라구, 아침에. 그거를 뿌리치고 출근을 했어. 돈이 없으니께 나도 방법이 없어. 밤에 퇴근하고 돌아가니까 복희가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어서 뜨지를 못해. 얼마나 억울하겄어. 그만큼 공부를 했는디 입학금을 못 넣어서 학교에 못 들어가는 게 얼마나 분하고 슬프겄어. 다 무효가 되었으니 복희는 복희대로 다락에서 울고 나는 나대로 부엌에서 울었지.
-
“누구를 만나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
“뭔데.”
“일단 자기 자신이랑 사이좋게 지내야 해.”
미란이가 한숨을 쉰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슬아가 웃는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자기 자신이랑 헤어질 수는 없잖아.”
미란이는 이마를 짚은 채로 말한다.
“난 차라리 너랑 사이좋게 지내는 게 훨씬 쉬워.”
-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신문에 실리고 테레비전에 나오고 책이 여러 권 팔린대도 말이다. 무신경한 인터뷰어도 배배 꼬인 악플러도 찬사를 보내는 독자들도 사실 진짜로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숙희와 남희가 그렇듯 자신 앞의 생을 사느라 분주할 테니까. 그것을 기억해낸 슬아의 마음엔 산들바람이 분다. 관심받고 있다는 착각, 주인공이라는 오해를 툴툴 털어내자 기분좋은 자유가 드나든다.
-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좋은 너. 미운 너. 웃긴 너. 우는 너. 아픈 너. 질투 나는 너. 미안한 너. 축하받아 마땅한 너. 대단한 너. 이상한 너. 아름다운 너. 다만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인 너. 동물인 너. 죽은 너. 잊을 수 없는 너. 그런 너를 보고 듣고 맡고 만지고 먹고 기억하는 나. 문학의 이유는 그 모든 타자들의 총합이다.
-
태어나서 좋은 점은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다. 예를 들어 엄마 품에 안길 때, 학교에 갈 때, 글쓰기 수업을 할 때 나는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 그럴 때면 나를 태어나게 해준 엄마와 아빠한테 고맙다. 태어나서 안 좋은 감정을 느낄 때도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엄마가 화낼 때, 친구와 싸울 때, 친구들 앞에서 망신당할 때 그렇다. 그럼 마음속으로 ‘나는 왜 태어난 걸까?’ 생각한다. 어쩔 땐 태어나서 기쁘고 때때로 슬프기도 하다. 태어났던 순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뭔가 신기하고 당황했을 것 같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생각 할 수 있다는 것도 태어나서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로 태어나고 싶다. 내가 언제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복희는 부엌에서 접시를 치우며 이와의 낭독을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운다. 왠지 모르겠는데 눈물이 나서다. 아이들 중 한명이 슬아에게 제보한다.
“복희 선생님 울어요.”
이와가 화들짝 놀란다. 복희 선생님이 운다니 이상하다. 복희는 아니라고 신경쓰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계속 눈물을 훔친다. 슬아는 이와에게 말한다.
“네가 너무 아름다운 걸 써서 그래.”
-
“티타네 할머니가 그러는데, 우리는 다들 몸 안에 성냥갑을 하나씩 품고 태어난대. 근데 혼자서는 성냥에 불을 댕길 수가 없대.”
“기억나. 촛불이 결국 타인이라는 얘기였지?”
“응. 혼자서도 활활 잘 타오르는 사람은 드물어.”
“맞아.”
“아무도 안 읽어준다고 생각하면 글쓸 수 있겠어?”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
“선생님은 먼저 선에 날 생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먼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요.”
-
찰나 같은 과거와 도통 모르겠는 미래를 생각하다가 웅이가 입을 연다.
“남자를 만날 거면,”
나사를 조이며 덧붙인다.
“너를 존경할 줄 아는 애를 만나.”
그렇게 말해놓고 웅이는 생각에 잠긴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자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웅이가 알기로 여자를 존경할 줄 아는 남자는 잘 없다. 웅이 자신을 포함해서 그렇다. 웅이는 불현듯 지난 동창회를 떠올린다. 사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다 맞춰준다는 말 같은게 아니었다.
슬아가 대꾸한다.
“보통은 나보고 존경하라고 하던데. 남자를요.”
“너는 누구든 잘 존경하잖아.”
웅이는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표현한다. 실는 내가 너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
예쁠 아는 계집 녀와 나 아로 구성되어 있다. 슬아의 할아버지가 ‘부생아신 모국아신’ 다음으로 힘주어 가르쳤던 한자다.
할아버지는 그 한자가 여자애의 이름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움은 계집다움이기도 하다고 어린 슬아에게 말했었다. 슬아는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그러나 이제는 너무 나이들어버린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아름다움은 중요한 가치야. 나는 아름다운 것이 좋아. 그치만……”
아이가 슬아를 본다.
“무엇이 아름다운 건지는 우리가 직접 정할 수 있어. 너는 너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명하게 될 거야.”
슬아와 아이는 글을 마저 읽는다. 가족의 유산 중 좋은 것만을 물려받을 수 있을까.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멀리 갈 수 있을까. 혹은 가까이 머물면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로에게 정중한 타인인 채로 말이다. 슬아가 아직 탐구중인 그 일을 미래의 아이는 좀더 수월히 해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
복희에게 아름다움이란 계절의 흐름, 맑은 날에나 궂은날에나 자라기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들. 웅이에게 아름다움이란 슬픔과 기쁨의 극치를 다 아는 가수의 목소리. 밥하고 글쓰는 두 여자. 슬아에게 아름다움이란 단정하고 힘있는 언어, 그리고 동료가 된 모부의 뒷모습.
-
“선생님, 월화수목금토일은 왜 있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고 슬아가 묻는다.
“왜 월요일은 계속 돌아오는 거예요?”
슬아는 그런 질문을 처음 들어봤다.
“그러게. 왜 월요일은 어김없이 계속 돌아올까…… 나도 모르겠네.”
.
.
.
슬아는 집으로 돌아가버린 어린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진다. 월화수목금토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다시 잘해보기 위해서라고. 다시 잘해볼 기회를 주려고 월요일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거라고. 그러느라 복희는 창틀을 닦고, 웅이는 바닥을 밀고, 슬아는 썼던 글을 고치고 또 새 글을 쓴다고.
-
돌봄과 살림을 공짜로 제공하던 엄마들의 시대를 지나, 사랑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아빠들의 시대를 지나, 권위를 쥐어본 적 없는 딸들의 시대를 지나, 새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비 부의 자리에 계집 녀를 적자 흥미로운 질서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질서를 겪어볼 기회를 소설에게 주고 싶었어요. 늠름한 아가씨와 아름다운 아저씨와 경이로운 아줌마가 서로에게 무엇을 배울지 궁금했습니다. 실수와 만회 속에서 좋은 팀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했습니다.
-
작은 책 한 권이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무수한 저항 중 하나의 사례가 되면 좋겠습니다. 길고 뿌리 깊은 역사의 흐름을 명랑하게 거스르는 인물들을 앞으로도 쓰고 싶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 맺는 가족 이야기만큼이나 가족으로부터 훌훌 해방되는 이야기 또한 꿈꾸고 있습니다. 사랑과 권력과 노동과 평등과 일상에 대한 공부는 끝이 없을 듯합니다. 이 공부를 오래할 수 있도록 길고 긴 세월이 제게 허락되기를 소망합니다.
'Lost in thou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푸른 풀 (1) | 2022.12.30 |
---|---|
구의 증명 (1) | 2022.12.24 |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1) | 2022.12.08 |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0) | 2022.12.03 |
희망이야 내가 찾는 건 (0) | 2022.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