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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t in thought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by Han Bi Choi 2020. 7. 26.



Be
너는 원래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어디에든 있을 수 있었다

되고 싶은 건 다 되어볼 수 있었다
엄마의 자궁 안에서

너는
아침에는 팔랑거리는 커튼
낮에는 팔랑거리는 나비
저녁에는 팔랑거리는 손짓
밤에는 팔랑거리는 파랑

너는 꿈속에서도
무엇이 되어 어디에 간다
물결을 일으키며
또다시 어디에 가서 또다른 무엇이 된다

진흙탕 위에서
고양이 옆에서
소나무 아래서

너는 신분을 잊고
자격을 포기하고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며, 함께 갸릉갸릉 울다가, 홀로 초연해진다

어디의 위에 있다는 것
무엇의 옆에 있다는 것
어디의 아래에서 무엇이 된다는 것

또다른 무엇이 된 너는 또다시 너를 간파하고 싶다

어디의 위에서,
무엇의 엎에서,
누구의 아래서,
너는 무적이 되었지만
그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아무도 알지 못했다

너는 새벽에는 팔랑거리는 이슬

어디에 가서
무엇이 되어
누구에게
맺히고 싶다 단숨에

너는
어디에나 있는 모든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엄마의 자궁 안에서부터
엄마의 자궁 안에서까지

그러니까
엄마의 자궁 안에서만
가능했던 이야기

너는 이 부조리를 견딜 수 없다

내 안팎을 나누는
금이 그어지기 시작하고

원래가 아닌 네가
적울 갖기 위해, 비로소
누가 되기 위해, 가까스로
태어난다, 연둣빛 나뭇잎이 되어
팔랑거리는 법을 새로 배운다,
여기에서




부조리
- 단독자의 평행이론
한 층 더 올라가세요
덕분에 한층 더 어두워졌잖아요

어떤 때엔 뒤로 걷는 게 편했습니다
그림자를 밟으며, 지워가며
한 발 한 발
홀로, 소실점으로 나타나기 위해
힘없는, 막힘없는 불가능이 되기 위해

꼿꼿한 벽을 향해
꿋꿋하게 외치기도 했습니다

더 많은 숫자가 필요해
더 많은 낱말이 필요해
그것들을 기억할
더 많은 뇌가 필요해

탐하기 위해, 기어코
머루를 먹기 위해
결국
뒤로, 위로
한 층을 더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미치지 마
거기에 미치지 마
거기에는 무서운 사람들이 있어
홀수 개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니 미치지 마
거기에 도달하지 마
거기에 사로잡히지 마

더 많은 숫자가
많은 숫자를 밀어내버리듯 가볍게
그림자를 소실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에는
더 많은 낱말을 만들어내고 싶었습니다
더 좋아질 가능성이 있는 최상이 되고 싶었습니다

기꺼이 머루에 혀를 내주고 싶었습니다

거기에 미치기 위해
불가능처럼 설레는 맘으로
첫걸음처럼 비장하게

한 층 더 올라갔습니다
한 충 더 어두워졌습다
온몸으로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그만 나를 덮어버렸습니다



면접
이름이 뭔가요?
전공은 뭐였지요?
고향에서 죽 자라났나요?

여기에 쓰여 있는 게 전부 사실입니까?

질문만 있고 답이 없는 곳에 다녀왔다

서 있어도
앉아 있는 사람들보다 작았다

거정 많이 떠들었는데도
듣는 사람들보다 귀가 아팠다

눈사람처럼 하나의 표정만 짓고 있었다
낙엽어럼 하나의 방향만 갖고 있었다

삼십여 년 뒤,
답이 안 나오는 공간에서
정확히 똑같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

녹지 않았다
순순히 떨어지지 않았다



스크랩북
오전에는 패션지에 실린 너를 오린다 너는 앉아 있지만 나는 모가지에서 너를 싹둑 자른다 스모키 화장을 한 네 얼굴이 마음에 든다 얼굴 없는 네가 의자에 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오후에는 신문에 나온 너를 오린다 너는 서 있지만 나는 눈 딱 감고 네 허리를 쳐내버린다 너의 상체는 내가 탐할 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네 반쪽이 방금 3면에서 사라졌다

네 가슴을 구하기 위해 나는 성형외과에 간다 성형외과에는 빵빵한 가슴들이 많다 나는 포스터를 훑고 맘에 든 가슴 한쌍을 오린다 조만간 너는 더 완벽하게 태어날 것이다

집에 와서 너의 부위들을 잇대기 시작한다 조각난 하루도 이어붙인다 패션지에 실린 너의 얼굴과 신문에 나온 네 하체 사이에 너의 새 가슴을 이식한다 너는 전보다 더 자신만만해졌다

수술을 마친 너를 분쇄기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른다 너의 육체가 국수 면발처럼 뽑혀 나온다 나는 너를 파괴하고 창조하고 다시 파괴할 권리가 있다 스모키 화장을 한 네 눈에 방금 쟂빛 눈물이 맺혔다

조각난 너를 가지고 폭죽을 만들겠다 너는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나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질 것이다 두 팔을 활짝 벌려 너를 안아주겠다 열리지 않는 책이 되어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겠다 신인가수가 깜짝 데뷔해 내 취향을 바꾸어놓을 내일모레까지는




오은 -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시인선 38)
2020.08.09에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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